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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대 후반 여자입니다

올해 딱 서른된 남친과는 만난지 1년반 정도 됐고

둘다 나이가 적지는 않은만큼 고백받아 사귀게 됐을때부터

서로 "결혼까지 생각할 수 있는 진지한 만남을 원한다" 는 의견일치 하에

미래를 염두해두고 만났습니다

 

남친도 저도 성격이 조용한 편이라

막 활화산처럼 뜨럽게 불타고  너없으면 나죽네사네 하며 심장이 터져라 하는

그런 연애는 아니었지만

그냥 함께 대화하고 맛있는걸 먹고 손잡고 걷고 여행을 다니고 사진도 찍으며

무난하게 만났습니다. 어떻게보면 너무너무 무난했죠.

주변 친구들이 "너네 커플은 딱 조선시대 선비와 규수가 교제하는 것 같다" 라고 할만큼요

 

물론 여자로서 그런 화끈한 연애를 갈망하는 마음도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 기분좋게 사겼어요. 성격이 비슷해 그런 연애스타일도 사실 잘 맞았고


말도 잘 통했고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같이 있으면 즐거웠습니다.

연인사이에 만나다보면 발생하는 작은 서운함. 불만 같은것도

항상 술 한잔씩 주고받으며 얘기하고 풀고 그랬구요.

 

그러다가 일주일전, 프로포즈를 받았고

저 역시 이 남자와 앞으로도 쭉 평온하게 함께하는 미래를 생각해왔었기 때문에

웃으며 반지 받았습니다. 

 

주절주절 쓰다보니 서론이 좀 길었네요.. 

 

그렇게 프로포즈 받았을때까진 참 좋았는데.. 문제는 그 후에 발생했습니다.

 

프로포즈 후의 당연한 수순처럼  이틀전 남친의 어머님을 뵈러 가게 됐습니다.

1년 반을 만났지만 처음뵙는거였어요.

 

아침일찍 남친을 만나,  과일이랑 꽃 사고

제주도 사는 친척을 통해 바로 전날 구한  제주도 황금향까지 나름 정성스럽게 박스포장해

어머님을 뵈러갔습니다. (아버님은 남친이 어릴때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어머님 첫인상은 솔직히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시월드에 대한 온갖 불안함과 막연한 상상들때문에 전날 잠을 잘 못이룰만큼 걱정했는데,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고

이런저런 음식도 준비해두셨더라고요..

 

아..정말 결혼이구나.   느낌을 확 주실정도로 정다운 분이셨어요.

 

함께 같이 맛있게 밥을 먹고,

제가 과일들을 깎아 후식으로 내왔습니다

 

그 후엔 어머님 손 잡고 좀더 대화나누다가 

이제 그만 가보라고 하셔서 자연스럽게 인사드리고 일어났구요.

 

그렇게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라, 그냥 남친에겐 집에 어머님과 함께 있으라고

택시나 버스타고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어머님이 도리어 다큰 처자가 어두운데 어떻게 혼자가냐며

남친은 뒀다 어디 쓰냐며

얼른 데려주라고 하시더라구요. 아 또 폭풍감동...   정말 딸같은 며느리가 될게요 다짐까지 했죠.

 

사실 돌이켜보면 이때부터 남친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던것 같은데

저는 온 신경이 어머님에게만 쏠려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차를 타고 집 모퉁이를 돌자마자, 좀 굳은 얼굴로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자기. 우리 엄마한테 좀 실수한것 같지 않아요? "

 

라고요.

난 미래 시어머님과의 첫만님이 예상보다 훨씬 너무 성공적이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소린지..   왜 그러냐고 하니까

 

모르겠으면 됐어요   그러길래

말을 해야 알지 않냐고 그랬죠.

 

입을 다물고 있길래, 몇번을 물어보니 그제서 하는 말이...

 

" 솔직히 설거지 정도는 자기가 하고 나올줄 알았어요"  라는 겁니다..

 

허어......

솔직히 처음엔 엄청 당황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에 말이 막히더라고요.

가만히 한 10초 정도를 진짜 붕어처럼 눈만 깜빡이다가...

천천히 말했죠.

(저희는 둘다 존댓말을 쓰는데, 걍 여기선 편하게 대화내용을 반말로 설명할게요...) 

 

물론, 이제 어머님 자주 찾아뵐거고

앞으로는 함께 음식도 만들고 함께 쇼핑도 하며 가까워질거고 당연히 설거지도 할거다..

하지만 오늘은 나는 어머님을 처음뵙는 자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님인 입장이다..

물론 어머님이 준비해주신 음식들 너무 감사하고 맛있게 먹었지만

오늘은 당신과 내가 결혼하게 될거라는걸  말씀드리러 온게 목적인데

내가 주방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건 좀 아닌것 같다..

 

그러니까 남친은

 

자기랑 결혼할거라고, 며느리가 될거라고 인사하러 온건데

그게 어떻게 남인 '손님' 이냐고.. 그렇게 말하는건 이해 안된다

그리고 첫만님이라 불편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네가 이쁘게 주방에서

설거지 뒷정리를 했다면 그게 얼마나 이뻐보였겠냐

 

이러는겁니다.

저는 더 황당해졌어요. 이런 상황은 예상도 못해서..

이때부턴 저도 좀 억양이 올라갔던것 같네요

 

그건 말도 안되는 가부장적인 사고다..

그럼 당신은 우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올때, 우리 엄마가 준비한 음식 먹은 뒤에

설거지 하고 갈거냐..

아. 남자라 설거지는 좀 그렇다면, 뭐 앉았던자리 청소라도 하고간다는거냐..

 

그랬더니

 

남자랑 여자랑 그게 상황이 같냐.. 

 

고 하대요. 이때부터 막 머리속도 심정도 복잡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여태까지 1년반동안 본적이 없는 모습이라 .

얘기하는데 막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고..아후..ㅜ

 

남자 여자를 따지자는게 아니라, 원래 첫 만남에서 설거지를 안했다는게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걸 말하는거다..

내가 앞으로 어머님 뵐때나, 결혼 한 이후에,  오늘처럼 계속 어머님이 차려준 밥만 먹고

설거지 하나 안도와 드리는 그런 여자일까봐 이러는거냐..

 

멘붕인 마음 다잡고 답답함을 토로했죠.

그랬더니

 

첫만남은 어때야되고 두번째 만남은 어때야되고 이런거 나는 잘 모르겠고..

며느리 될 여자 맞이한다고 음식도 시간들여 하신걸텐데

엄마가 또 혼자 설거지 할거 생각하니까 기분이 안좋다

설사 네 말이 옳은거라도 나는 기분이 안좋다

 

라고 딱잘라 말하네요..

이때부터는 저도 물러설수 없는 마음이 되버려서

 

왜 어머님이 혼자 설거지를 하냐. 아들인 당신이 도와드리면 되는거 아니냐

 

그러니까

 

내가 하는거랑 자기가 하는게 같냐.

그리고, 그러려고 했는데 엄마가 자기 데려다주라고 하지 않았냐 면서 

소리를 확 지르더라고요.

 

하.....

기가 막혀서

 

그럼 나는 혼자 가겠다.  돌아가서 어머님 설거지 도와드려라. 내려달라  그랬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진짜 점점 실망스럽게 왜이러냐고

자기한테 이런면이 있는지 몰랐다   고 하대요..

 

나도 당신한테 실망스럽고 이런면이 있는지 몰랐다. 차 세우라   그랬죠.

 

본인도 진짜 화가 났는지

정말 세우더군요..

내리니 쌩하게 가버렸습니다.

 

얼마나 충격인지, 차에서 나눈 대화들도 너무 또렷하게 다 기억나고...

 

솔직히 어딘지 잘 모르는 인적이 좀 드문 곳이었는데 한참을 걸어서야

택시 잡아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요..

택시 타면서부턴 눈물이 펑펑 나오더라고요..

 

그날 그러고나서

이틀이 된 지금까지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있습니다..

 

 

정말 그동안 그렇게 서로 말이 잘 통했던게,

무탈하고 평온하게 만났던게,

어떻게 갑자기 이런 순간이 찾아오나 망연자실하고..

 

너무 충격이고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고

일할땐 참겠는데

자꾸 틈날때마다 눈물만 나네요

 

화가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가,

밤에 혼자 생각해보면   내가 잘못생각했던건가.. 그깟 설거지가 뭐라고..

왜 안했을까.  남친 말이 맞았던걸까

생각도 들고요...

홀어머니 안타깝고 안쓰러워 하는 그 마음을 내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건가

자책까지 듭니다.........

 

제가 잘못한걸까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오기도 생기다가

먼저 사과해야할까  한시간에도 몇번씩 생각이 막 얽히고설킵니다...

이대로가면 이 만남도 결혼도 끝인걸까요..??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발 현명한 조언 부탁드려요....